OPINION
수십년 묻혀 있던 삼성家 '국보 컬렉션' 막후 스토리
20년간 이병철·이건희 수집활동 돕던 이종선 관장 책 내고 컬렉션 비화 전격공개
기사입력: 2016/01/29 [14:00]  최종편집: ⓒ lovesamsung
김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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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명품 컬렉션 20년 만에 베일 벗었다!

상세한 에피소드와 내막은 누구도 알 수 없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야기

▲ 20여 년간 삼성가 수집활동을 돕던 이종선 관장에 따르면 이병철 창업주(왼쪽)과 이건희 회장(오른쪽)은 '명품 컬렉션' 스타일이 확연히 달랐다고 한다.     © 러브삼성


20여 년간 삼성가(家)의 명품 컬렉션을 주도하고 박물관 건립과 성장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이종선(68)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이 삼성가 컬렉션 후일담을 담은 책을 내놓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종선 관장은 국내에서는 드물게 고고학에서 미술사학, 수집학, 박물관학까지 전방위적 이론과 실무, 현장과 대학을 아우른 학자이자 실행가이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고고학, 미술사학, 인류학, 중국학을 공부했다. 1976년에 삼성문화재단의 호암미술관 설립과 개관 및 운영을 위해 이병철 회장에게 발탁된 후 20여 년간 삼성가의 수집과 박물관 건립을 주도하며 국보급 문화재 150여 점을 수집, 확보하는 황금기를 만들었다.


호암미술관 부관장을 역임하고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역사박물관 초대관장, 경기도박물관 관장, 한국박물관협회 부회장, ICOM 한국위원회 부위원장, 경기문화재단 이사,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한국박물관학회 회장, 삼성미술관-리움 자문위원을 지냈다.


이병철 회장부터 이건희 회장까지 20여 년간 우리 문화재 수집과 박물관 건립을 함께 해온 이 부관장은 최근 펴낸 <리 컬렉션>(김영사)이란 책을 통해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명품 컬렉션의 시작부터 국보 100점 프로젝트를 거쳐 현재 간송미술관 이상으로 가장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보유하기까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가야금관, 청자진사주전자, 백자달항아리, 고구려반가상, 단원과 추사의 그림과 글씨 등 호암과 리움미술관에 자리잡은 ‘삼성가 국보 컬렉션’의 막후 이야기가 20년 만에 베일을 벗게 된 것.


“‘삼성가와 수집’, ‘박물관과 문화’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어떤 이에게는 이 내용이 단순한 호기심 충족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비판거리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의 호기심을 채우거나 말하기 좋은 이야깃거리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약 20년간 내가 직접 몸담았던 호암미술관에서 리움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삼성이 단초가 되었던 우리나라 문화 예술계 발전의 한 단면을 알리고 싶을 뿐이다.”


“내가 수십 년 동안 옆에서 직접 보고 체험했던, 이병철로부터 이건희까지 수집과 박물관에 관련된 상세한 에피소드와 내막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야기,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기업 외적인 활동으로 왜 수집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개인적 취향이 수집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수집품이 명품의 반열에 올라 박물관에 자리 잡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그려내고 싶었다. 그 안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명품이 탄생하고 자리 찾기까지의 숨겨진 문화사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자산으로 가치가 있다. 수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박물관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건립은 ‘공공화’를 의미하며 이는 ‘수집의 사회 환원’이라는 형태로 수렴되기에 그렇다.”

▲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각별히 애착을 보였던 ‘국보’ 가야금관(제138호)과 청자진사주전자(제133호).     © 사진출처=문화재청 홈피


이 관장은 모두가 궁금했지만 잘 알 수 없었던 비밀의 봉인을 풀고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이 가진 명품 컬렉션의 시작부터 국보 100점 프로젝트를 거쳐 현재 간송미술관 이상으로 가장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보유하기까지 그 안팎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펼쳐낸다.


이 관장은 책속에서 이병철 회장과 국보 제138호 가야금관에 얽힌 비화도 털어놨다.


“이병철 회장의 명품 컬렉션 중 그 첫째와 둘째를 다투는 작품이 있다면 ‘가야금관’과 ‘청자진사주전자’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야금관’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소재를 파악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이 회장의 애착이 대단했다. 심지어 직접 금관의 부속 유물들을 몸체에 부착해보며 들여다보곤 했다.

금관은 도굴과 도난 우려가 큰 유물이고, 또 국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집품이어서 공개 후에 경비가 대폭 강화되었다. 경비 강화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이병철 회장은 금관과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진품 대신 전시하도록 지시했다.

이병철 회장의 금관에 대한 애착은 금관이 겪은 모진 수모에 대한 연민과 호시탐탐 노리는 호사가들과 도난에 대한 걱정으로 더욱더 커져갔지만, 무엇보다 이 회장에게 금관을 소개한 이의 과장된 수사의 영향이 컸다. 누군가가 이 ‘가야금관’이 실제보다 오래되었다고 전했고(실제 연대는 5∼6세기이지만, 그는 수백 년을 앞선 최초의 금관이라며 치켜세웠다고 한다), 이 회장은 결국 금관을 늘 곁에 두고 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는 매일 아침 금관의 소재부터 확인할 만큼 ‘가야금관’에 집착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 회장 앞에서는 금관의 실제 연대를 밝히지 못했다.”


“국보 제133호 청자진사주전자는 워낙 귀한 물건이기도 했지만, 자태를 보면 압도당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일품이다. 그렇다 보니 이병철 회장의 이 주전자 사랑은 끔찍했다. 1982년 호암미술관 개관을 위해 2층에 전시실을 마련하면서 30밀리미터 방탄유리로 쇼케이스를 제작했는데, 바로 이 주전자 때문이었다. 루브르미술관의 ‘모나리자’ 경비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이는 그저 전시에만 급급한 기존 박물관들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는지, 평상시에는 복제품으로 대체해 전시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도예가 석봉 조무호가 복제한 복제품이 전시실 한 켠을 지키게 되었다. 복제품을 만들고 싶다고 자청한 도예가가 줄지어 문의를 해와 결정이 곤란했던 기억도 난다.”


훗날 이 가야금관과 청자진사주전자는 이병철 컬렉션의 최고품으로 꼽힌다. 이건희 컬렉션의 백미로는 백자달항아리와 청화백자매죽문호가 꼽힌다.

▲ '이건희 컬렉션' 백미로 꼽히는 백자 달항아리. © 사진출처=김영사


“청화백자매죽문호는 지금은 당당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그만큼의 대접을 받고 있지만, 이건희 회장의 수중에 들어올 당시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항아리로는 꽤 큰 편에 속하는 높이 41센티미터의 조선 초 청화백자 명품이 세상에 나왔는데, 주변에서는 다들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전문 학자들이나 골동품상들 사이에서 진위에 대한 시비가 적지 않았다. 만약 진품이 확실하다면 이는 전후 최고·최대의 명품이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1976년 종로구 관철동 부근의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비슷한 모양의 백자 어깨 부분 파편이 출토된 것이다. 정말 의외의 사건이었다. 왜 이런 곳에서 청화백자 파편이 나왔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심지어 국보로 지정된 이 항아리마저 도굴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꼬리를 물기까지 했다. 사건의 추이와는 관계없이 이 항아리의 진위 문제는 그렇게 결론이 났고, 198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국보 대접을 꽤 늦게 받은 셈이다.”


삼성에서는 총 150건이 넘는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했다. 현재 서울의 리움미술관과 용인의 호암미술관에는 국보 37건과 보물 115건, 도합 152건이 분산되어 전시되거나 보관되어 있다. 개인의 수집으로 볼 때 국보급 지정문화재 152건이라는 숫자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수집을 시작하여 박물관 운영으로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과 호림박물관의 국보와 보물을 합쳐도 70건이 되지 않는다.


이 부관장은 “박물관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시작된 삼성가의 수집과 박물관 건립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의혹과 시샘, 질타가 있었다”면서 “구설수가 뒤따랐고 각종 사회적 사건들에 얽히고설킨 뉴스들 속에 그들의 수집은 순수한 개인의 열망으로만 비쳐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자의반 타의반으로 불문(?)에 부쳐진 국보급 이야기의 빗장을 푼 이 부관장은 “책을 펴내기 위해 20년을 기다렸다”면서 “수집은 몰라도 박물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명품들이 간직하고 있는 풍파와 숨겨진 이야기를 책속에 담아내고 싶었다. 의도적으로 숨겨졌거나 뜻하지 않게 묻혀졌던 수집 그 뒤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꺼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삼성을 떠난 지도 어언 20년, 나는 누군가의 애정을 보필하는 데에 꽃 같은 젊음의 열정을 듬뿍 바쳤고, 이 이야기를 꺼내는 데 20년을 기다렸다. 참 무던히도 묵혀왔다.
흙더미를 헤친다고 곧장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며 오랜 시간을 거쳐야 대지는 비로소 유물의 흔적을 토해낸다. 마찬가지로 나는 바로 이즈음이 삼성의 두 경영자가 대를 이어 이뤄낸 한국 미술사 속의 참 맵시를 세상 밖으로 꺼낼 때임을 느꼈다.”


이 관장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은 컬렉션 스타일이 확연히 달랐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은 엄혹한 1970∼1980년대에 당대 서화가와 문사들을 후원했으며 고미술과 골동품에 취했지만 비싸다고 판단되면 누가 뭐래도 구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반면 국보 100점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최고의 걸작으로 멋스런 박물관을 만들어낸 이건희 회장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값을 따지지 않고, 좋다는 전문가의 확인만 있으면 별말 없이 구입했다고 한다.


이렇듯 이 관장이 수십 년 동안 옆에서 직접 보고 함께했던, 이병철로부터 이건희까지 이어진 수집과 박물관에 관련된 사연과 내막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야기라서 20년간 잠자고 있던 더욱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펼쳐내고 있다. 삼성가 2대를 거쳐온 수집 활동은 어느덧 우리나라 미술사를 아우르는 무수한 걸작들을 그 품속으로 끌어들였고, 시작과 끝에 언제나 이 관장이 있었다. 삼성을 세우고 이끌어온 이병철·이건희 부자의 곁에 그림자처럼 머무르며, 그들의 수집 벽(癖)을 또한 ‘수집’했던 이 관장은 그렇게 ‘명품 컬렉션’을 완성시켰다.


이 관장은 “수집이란 어디까지나 애정과 갈망 그리고 집념의 문제”라면서 “이병철·이건희 부자의 애틋하고 간절한 갈망이 없었다면 그들의 ‘수집’이 그 수많은 풍파를 헤치고 나라를 대표하는 ‘명품’으로 오늘날 대중에게 선보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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